생명력을 돌아 본 한 해
사회학에 눈을 돌린 계기
아빠는 매일 저녁 티비를 보면서 정치인사들을 욕했다. 엄마는 매일 정치 얘기를 하는 아빠의 푸념이 싫다고 했다. 다 똑같은 놈들인데, 소시민이 뭔가를 해봤자 뭐가 달라지냐고. 부끄럽게도 고등학생때까지의 나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걸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정치학보다는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며 두 분은 대체 왜 싸우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오래 했다. 그리고는 두 분은 너무나도 '다르고', 싸우는 이유는 늘 '돈'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개인보다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 우리 가족이 놓여있다는 결론이 났다.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을 알게 되니, 예전엔 방문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짜증났는데 그렇지 않게 바뀌었다. 단지 나는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에 더 관심을 가지며 사회학을 읽고, 공부하며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집중하려 했다. 사회학과 진학은 실패했다. 나는 학점을 맞춰 낮은 대학의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다시 만난 세계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싸움, 진보-보수를 얘기하며 싸우는 할아버지들, 남/여 갈등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나의 친 언니가 나를 위해 꿈을 희생한 이후부터 조금 방황하는 모습도 봤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만의 '가치관'을 만드는 게 중요해졌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나만의 관점'을 가지면 현명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은 예술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영화 티켓을 구해서 우리 자매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이때 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몰입'의 경험이 남긴, 영화 속 장면들의 이미지(심상)이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다. 그리고 이 경험을 가지고 '시네마떼끄'라는 동아리에 들어갔고,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경험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다른 관점으로 여러 일을 겪어 온 학교다. 이 곳에서 자연스럽게 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시네마떼끄'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히 학과도 다르고, 꿈도 다르다. 지금 돌아보면 기자가 된 사람,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사람, 큐레이터가 된 사람, 마케터가 된 사람, activist로 활동하는 사람, 영화감독이 된 사람 등 예술을 매개로 독특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었다. 매일 매일 영화를 보면서, 예술에서 겪는 사유가 내가 똑바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고 믿었다. 나와 아예 다른 환경에서 아예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간접 체험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미투로 촉발된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고 집회에 나가고 여성학을 부전공만큼 많이 공부했다. 여성학은 여성을 위한 학문이라기보다, 소수자를 위한 학문이다. 여성, 장애인, 동물, 소수인종 등 모든 차별을 겪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한 강의에서 김주희 교수님께 들었던 말이 내가 왜 다름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었다. "언제든 나도 그 상황에 놓일 수 있다."
한 번의 타협
수능을 준비하던 때에 세월호 사건이, 입학하고는 최순실 사태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바로 윗학번 선배가 부르짓는 장면을, 그때 활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꿘'이라고 비아냥되는 깎아내림과 '변화를 만들어낸 이들'이라는 존경으로 나뉘는 것도 보았다. 또한 페미니즘 안에서도 또 양분화되었다. 모든 변화를 촉발시키는 힘이 분산되는 게 아까웠고, 결국 이렇게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되는구나 좌절했다.
그리고 영화 마케팅을 하려고 여기 저기 알아보다가 사장 산업에서 돈을 버는 게 어렵다는 걸 크게 깨달았다. 나에게 남은 길은 더 공부를 해서 석사학위를 따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당장 내일의 장학금을 못 받을까봐 절박하게 공부했고, 월세를 내기 위해 알바를 해야했다. 나는 가난을 경험했기에 다시 그 곳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는 영향력을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바뀌었다.
좋아했던 것들은 취미로 미뤄두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아등바등 경주마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새벽 3시까지 혼자 회의실에 남아서 터진 이슈를 어떻게든 수습해보고, 술만 마시면 새벽에 혼자 걷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면서, 새로운 일을 잘 해보려고도 해봤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든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겠거니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계엄령과 Where Change Begins
Where Change Begins 라는 말을 좋아한다.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에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직도 있다. Where Change Begins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영향력, 그리고 내가 행동할 수 있는 발걸음 둘 다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리되고 있다. 전자만 키우려고 노력했던 나에게 12.03 계엄사태는 다시 한번 움직이게 했다.
권력주의에 희생된 광주의 수많은 피 위에 올려진 나라가, 다시 한번 이를 반복하게끔 시도하는 걸 봤다. MBR을 쓰고 있었는데 뭔가 장이 뒤틀리는 경험을 했다. 계속 쓰고 바쁘게 한 주를 마무리했는데 카톡이 왔다. 잊고 있었던 시네마떼끄의 현재 학번이 함께 시위에 나갈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의무를 다 하지 않으려는 국민의 힘 의원들을 못 가도록 몸으로 막고 있었다.
시네마떼끄에서 자주 보고 좋아했던 <몽상가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온 영화광 유학생인 매튜가 이사벨과 테오 라는 젊은 프랑스인 자매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얘기다. 68혁명이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분노, 무기력이 혼재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변화를 위한 의지 하나로 친해진다. 시위대가 창문을 깰 때 친했던 셋도 레디컬한 방법, 윤리적 방법 사이에서 갈등한다. 매튜는 68혁명이 터질 때 방에 있고, 테오 이사벨은 거리로 화염병을 들고 나간다.
토요일에 나가지 않으면 내가 배웠던 살아가는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애령 교수님의 철학 수업에서 철학은 행동하는 학문이라고 배웠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잠도 안자고 사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느꼈다. 내란죄를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은 국민의 힘 의원들의 비굴함으로 부결되었다. 나는 또 다시 'I want a dyke for president'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바텀업으로 목소리 내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느꼈다. 거리에 나갈 때마다 국회에 있었던 사람들의 체온을 통해, 변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우리는 개인의 힘이 막강했다가 몰락하는 중간에 살고 있다.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할 수 있다는 신화가 무너지는 시대다. 요즘 시대의 내 또래는 회피, 무관심, 무력함을 주로 느낀다. 예전에는 인간이 ‘냉철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올해 많이 무너졌다. 인간은 유약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위기, 차별, 독재 등의 풍파에 노출된 인간은 쉽게 저항 의지를 잃어버린다는 걸 발견했다. 나도 일을 하며 무력해졌던 경험이 많다. 그래서 작은 사회에서든 큰 사회에서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회복력도 강하다. 주위의 따뜻함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자기반성으로 성장의 동기부여를 받는다. 이 모든 엔진의 동력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의지, 생명력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 ‘더 나은 삶’에 대한 가치관이 올바른 본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존을 위한 이기심이 아니라, 본디 생명의 숭고함을 인지하고 타인의 생명도 존엄함을 이해하는 것. 그는 ‘양심’이라는 본능임을 느낀다. 양심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을 못 본 채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을 무시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은 우주의 재앙 앞 홀로 남겨진 무력한 개인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자식도 잃었고, 남편도 없다. 그 어떤 명분과 동기없이도 ‘삶’ 하나를 위해 끝까지 정신줄을 붙잡는다. 어이없게 잃어버린 딸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 동료 비행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이다.
김소영 작가의 말처럼 “언제나 절망이 쉽다”를 잊어서는 안된다. 인상적인 문장을 직접 적어보며, 상기해보고자 한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주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외면하면 안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