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던 장면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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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에서 본 영웅의 서사
- #1. 첫 환영회
- #2. 새벽의 화이트보드
- #3. 망한 날의 밤 산책
- 서로를 돕는 사람들
전시에서 본 영웅의 서사

전시에서 본 영웅의 서사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개인이 압도적인 미션을 제시받고 조력자를 만나고, 시련을 만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결국 마지막, 내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내 여정을 되돌아보며 문을 나선다. 10번에 있는 사람은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 속 트루먼의 모습이다. 주인공이 나를 속이는 드라마에서 스스로 벗어나며 끝난다. 나는 PM이 되고 겪었던 일들을 반추해보며, 영웅의 서사가 개인의 성장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새 직장에 들어와 제일 많이 배운 건 나 자신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엇은 하등 신경도 쓰지 않는지를 이렇게까지 고민한 건 처음이다. 최근 반 년 동안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여정들 덕분이다.
#1. 첫 환영회
내가 콘텐츠 스쿼드에 합류하고 팀은 나를 환영해주는 자리를 만들었다. 형식적인 입사 환영회와 이 곳은 달랐다. 진심으로 나라는 사람을 궁금해 하고, 서로를 아낀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 일했던 곳과는 사뭇 공기의 온도가 달랐다. 이 환영회에서는 익히 들었던 소문처럼, 대학교 동아리를 다시 다니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4시간 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행복해보였다. '재미있는 스쿼드'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반신반의 했던 것도 살이다. 여기는 회사 아닌가? 회사에서 무슨 재미를 추구하나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을 쌓아보니, 단순히 '재미'라곤 말하기 어렵다. '문화'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완벽한 문화란 존재하지 않으나 확실한 문화란 존재할 수 있다. 문화에는 말하지 않아도 따르는 암묵적인 원칙들이 있었다.
- 1) 반대 의견이 있다면 주장할 것
- 2) 함께 시간을 보낼 것
- 3) 서로의 사적인 측면까지 이해할 것.
#2. 새벽의 화이트보드
낮에는 각자의 개발 작업, PM은 미팅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도 저녁을 같이 먹으며 사적인 근황을 나눴다. 그리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고 어느 순간 화이트보드 앞에 모여 있다. 처음엔 이게 굉장히 어색했다. 나는 보드 앞에서 무언가를 그리면서 사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는 상당히 수렴적이라서, 글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드에 아키텍처나 구조도를 그리면서 그때그때 반대 의견을 나누며 수정해나갔다.
나는 사실 부러워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이 PO는 엔지니어가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합도 잘 맞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삐끗했었다. 첫 제품을 만들 때 나의 수렴적 사고대로 일하려고 하다가 충돌된 적이 있었다. 나는 마케터 시절 Planning & Execution에 탁월한 리더의 관리법에 길들여져 있었고, 팀을 그대로 매니징하려고 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칸반을 만들고, 추천 Logic까지 설계하며 아키텍처링의 범위를 넘고 있었다. 그러나 엔지니어와 일하면서 자꾸만 부딪혔었고, 나는 엔지니어가 '창의적 사고' (즉, 발산형 사고)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익혀나갔다. 그러고 나니 '화이트보드'가 엔지니어가 발산하기 매우 적합한 도구라는 점을 습득한 것 같다.
이제 나는 제품의 로드맵을, 그리고 제품에 대한 생각을 화이트보드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도메인이 지향하는 광고라는 시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린다. 그리고 우리 회사가 가진 인벤토리의 as-is와 to-be를 그린다. 우리가 점차 Retail Media로써, 더 나아가서는 파트너 성장 솔루션으로써 넓혀 갈 영역을 '영토 확장'을 하듯이 넓혀나간다. 그리고 반대 의견이 있다면 수정한다. 회의록은 필요하지 않고 화이트보드를 찍으면 그것이 우리가 공유했던 토론과 시간에 대한 회의록이었다.
나는 이때 화이트보드가 생각을 정리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팀 빌딩'에 효과적이라는 걸 습득했다. 그리고 이는 모두가 함께 참여할 때 그 가치가 배가 된다.
#3. 망한 날의 밤 산책
콘텐츠 스쿼드의 문화는 내가 망했을 때 그 가치를 알게 해줬다. 나는 stakeholder와 align을 하지 못해서 스쿼드의 한 분기 성과를 날려먹은 적이 있다. 이때 3개월을 바친 OKR이 통째로 날아가고, 사용하지 못하는 제품들을 만들어낸 비참한 결과가 되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은 이직의 주기가 평균 2년 내로 짧았다. 그래서 3개월이라는 시간은 스쿼드원으로써 많은 투자의 시간이다. 나라면 내 성과를 날려먹은 이 PO가 미웠을 것 같다. 나는 스쿼드 위클리에서 사실 두려움에 떨면서 운을 뗐다. stakholder가 이 제품을 쓰지 못한다고 얘기했다고. 아무도 대답도, 반응도 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첫 PO를 의심하지 않고 잘 온보딩하도록 도와준 '첫 환영회'의 장면처럼, (일부는 떠났지만) 일부는 오히려 내게 힘이 되어줬다. 그간 쌓아 온 가치관을 공유했던 시간들이 최소 '미래를 함께한다'라는 공동의 암묵적인 믿음을 만들어낸 것 같다.
내가 망한 날, 나와 함께 일했던 PO와 밤 산책을 하며 나눴던 대화들이 기억난다. 본인이 망했을 때 콘텐츠 스쿼드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단단해졌던 장면, 본인이 문화를 왜 중요시 여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어릴적 이야기, 본인의 원래 성격이 가진 수줍음 등을 이야기했다. 이 사람의 캐릭터는 장난기 많고, 뻔뻔한 장꾸라고 생각했는데 단단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가끔 연기를 했던 것이다. 천성적인 특성들을 이겨내면서 매 순간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건 여전히 내가 노력해도 따라할 수가 없는 자질이다. 그리고 망한 분기의 OKR에 대한 피드백을 줄 때도 그랬다. 나에게 몇 분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피드백을 했었다. 그때 이를 조금 더 새겨들었다면.. 후회하면서도, 망한 날에도 여전히 곁에서 티나지는 않지만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 줘서 고마웠다.
서로를 돕는 사람들
- 나를 객관화시켜주는 사람
- 나를 믿어주는 사람
- 나와 끝까지 싸우는 사람
어떤 장면들은 다시 볼 때 고통스럽고, 어떤 장면들은 "그땐 그랬지"라는 추억 회상 정도의 감상에서 끝난다. 그러나 PM이 되고 약 2년간 쌓았던 이 장면들은 다시 볼 때마다, 언제나 나에게 따뜻함을 안겨준다. 장면들에는 언제나 사람이 남아있다. 이 따뜻함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